바울의 중보기도 (살전 3:11~13)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법칙입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하신 것은 결코 사람이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한문의 사람 人자만 보아도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나 혼자서도 다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착각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가 서로 만나 사귐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우리가 일평생 살아가면서 단지 스쳐 지나가기만이라도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 가운데서 그래도 얼굴을 보고 서로 반가워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같은 목적으로 있다고 해서 다 아는 사람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제 결혼예배에 참석한 사람들만 하더라도 같은 자리에 같은 목적으로 참석했지만 그 중에 절반은 제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신부를 축하하기 위해서 온 사람 가운데서도 신부의 직장 사람들은 제가 잘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 가운데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고 다들 잘 아는 사람들로 모여 있습니다. 물론 잘 안다고 해서 또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누구를 만나 알게 되고 그 사람과 친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누구는 싸우면서 정이 든다는 말도 합니다만 이왕이면 싸움 없이 정이 들면 더 좋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 모습이 어디 상대방의 마음에 다 들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모습이 또 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좋은 모습도 있고 눈에 거슬리는 모습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아주 꼴도 보기 싫은 그런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교회가 오죽 많습니까? 그런데 하필 향남교회였습니까?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말합니다만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향남교회에서 함께 만나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된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발길을 향남교회로 인도하여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만남은 언제라도 얼굴만 보아도 신나고 함께 있는 그 자체로 즐거운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아름다운 관계를 이어나가는 바울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모습을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중보기도를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려지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함께 지낸 시간은 단 3주간뿐이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그곳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3주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 중에 그 말에 설득되어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그리스인들과 적잖은 귀부인들도 바울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대할 때 마치 아버지가 자녀를 대하듯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아 주었고 그들을 높여 주고, 위로하며, 하나님을 위해 선한 삶을 살아가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사람의 말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 바울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랬기에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있는 동안에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특히나 교회를 향한 핍박이 아주 심해지고 있는 때이기에 혹시 그런 어려움으로 인해서 믿음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디모데를 보내보았는데 디모데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조금도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켜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을 다시 한 번 보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하니 어찌 바울인들 그들이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몰론 데살로니가에 들러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그 길이 계속 꼬입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시오.”
이것이 바울의 지나친 욕심일까요? 아닙니다. 단지 만나서 “반갑다 잘 지냈니? 뭐 어쩌고저쩌고,” 하려고 만나고 싶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정말 자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너무도 멋지게 잘 자란 내 친 자식과 같은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라는 말을 씁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로 그런 존재란 말입니다. 그래서 더 보고 싶습니다. 비록 디모데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그 숱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켜나가고 있다고 하니 더 보고 싶은 걸 어떡합니까?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참으로 묘합니다. 한때는 서로 얼굴을 보는 것조차도 민망해하던 그런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렇게 힘들게 소식을 알아 연락을 했더니 얼마나 반가워하시는지 한달음에 달려오셔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얼싸안을 때 그 때의 기쁨을 아십니까? 한 친구는 공군 파일럿이었는데 그만 장성진급을 못하고 전역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소식이 끊겼는데 혹시나 싶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더니 그 이름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 그 연락을 했더니 얼마나 반가워하든지 그 친구 역시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이게 사람의 정인데 서로 보고 싶고 그것도 간절히 보고 싶어 하면서도 사정이 여의치 못해 만나지 못할 때 그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래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로 가서 그들을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십시오.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그들입니다. 그렇기에 더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가 항상 이런 모습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언제 어느 때든 그저 같이 한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고 잠시만 보지 못해도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가르치실 때 가장 강조하셨던 것이 바로 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곧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그래서 구제를 해도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고 하셨고 기도를 해도 골방에 들어가 하라고 하시며 금식을 해도 전혀 티를 내지 말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도움을 받는 사람 또는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고 금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민망해하지 않도록 배려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한다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하겠지만 그러나 그럴 경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상처가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도 강조하시는 것이 용서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우리가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그리고는 곧 바로 다시 한 번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누구든지 잘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 바로 용서입니다.
그런데 어디 용서가 그리 쉽게 됩디까? 오히려 서운한 마음부터 들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웬만해서는 그 서운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주님께서 우리들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내 마음으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감당이 되지를 않습니다. 참아야지 해도 분하고 서운한 마음으로만 가득하니 어찌 참을 수가 있고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마음에 그 모든 서운한 마음을 다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주님의 사랑으로 풍성해야 합니다. 결국 이 말은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주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내 마음이 가득 채워질 때만 참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하시기를 기도하며 그를 통해서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서로 사랑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정말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렇다면 왜 못 오느냐고 하는 소릴 들을망정 그래도 나는 변함없이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만큼 정말 부끄러움 없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도 서로 사랑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그렇게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했던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아버지가 자녀를 대하듯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아 주었노라고 했습니다.
어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여러분을 대했노라고 했습니다. 꼭 어린 자녀에게만 그렇겠습니까? 자식이 다 크면 그 사랑이 식는 겁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커갈수록 더 조심스럽습니다. 혹시 말 한 마디에 상처나 받지는 않을까 싶어서 때로는 하고 싶은 말도 그냥 삼켜버리고 맙니다. 그게 부모입니다. 그나마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을 때의 그 마음을 아십니까? 바울이 지금 그런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도 덜도 말고 자기처럼만 서로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하여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사랑 넘치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면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사랑만으로는 안 됩니다. 내 결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마음에 사랑으로 풍성하도록 넘치도록 만들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먼저 저들의 마음이 사랑으로 풍성하고 넘치도록 만들어 주세요. 그래서 그들이 서로 사랑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사랑으로 수고하고 있지만 조금 부족한 듯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정말 사랑으로 넘쳐나는데 사랑으로 수고하는데 자기의 마음에 조금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든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마음을 사랑으로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하여 주셔서 서로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바울의 권면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나처럼 그렇게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하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도우심을 통해서만 이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참되게 사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바울처럼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도록 하십시오 라고 말하기에는 저는 아직 부족함이 더 많습니다. 그래도 사랑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차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도 주님이 사랑으로 풍성하게 하시고 넘치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며 아울러 성도 여러분들 역시 그 주님의 사랑으로 넘쳐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지난 며칠간 저는 아주 호되게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누구는 딸을 시집보내노라 신경을 써서 그렇다는 말씀도 하십니다만 그보다는 누군가 저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은가 싶은 마음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아니 성도들 간에 이런 저런 갈등의 모습이 있음을 지켜보는 마음 또한 그렇습니다. 한 자리만 비어 있어도 그 빈자리를 바라보는 마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습니다.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 모습이 눈에 띌 때는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음 아파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아픔들을 다 감싸 안을 수 있는 사랑이 내게 있게 하여 주십시오. 저 아픔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랑으로 내 안에 가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어떤 가식이나 위선으로 비쳐지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하고 기도할 뿐입니다.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밥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래본 적이 없었는데 아무리 심하게 앓아누웠어도 입맛이 없어서 못 먹었던 적이 없었는데 지난 며칠 동안은 제가 생각해도 너무도 이상할 정도입니다. 마지못해 몇 술 떠보지만 그나마 모래 씹는 것만 같습니다. 그 좋아하던 음식이 앞에 놓였는데도 손도 대기가 싫을 정도입니다. 저 뼛속 깊은 곳으로부터 냉기가 차오르는데 견디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 본당에 들어와서는 한참을 앞의 난로 앞에 서서 쪼이고 나야 조금 풀릴 정도입니다. 오늘 이런 고백을 드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참으로 두렵습니다. 이런 고백 때문에 또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어찌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사랑하는 만큼 아픔도 더 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가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울 사도의 고백의 기도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사랑으로 풍성하게 하시고 넘치도록 하여 주셔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줄로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우리 모두 진실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십시다. 서로 감싸 안으십시다.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마음이 믿음 안에서 강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때로는 우리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습니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서이기도 하고 겨우 이런 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흔들리는가 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 힘든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물론 몸이 아픈 것을 볼 때도 그렇지만 그 마음에 어떤 상처 때문에 아파하는 모습을 볼 때 그리고 그 상처가 바로 나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정말 견디기가 힘이 듭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 사람이라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상처가 되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러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또 상처를 주고 있어요. 그게 왜 그렇습니까? 내가 믿음 안에서 마음이 강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지금 믿음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강해지기를 기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 안에서 강해지지 않고는 우리는 작은 바람에도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인들 왜 힘들지 않겠습니까?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그 모든 어려움들을 견딜 수가 있었겠습니까? 물론 보람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힘들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것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믿음 안에서 그 마음이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혼자였다면 그렇게 믿음 안에서 마음이 강해질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 옆에는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심껏 바울을 돕고 바울과 함께 하며 바울을 위해서 기도하였기에 바울이 믿음 안에서 그 마음이 강해졌고 그래서 견딜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 안에서 그 마음이 강해져야 할 사람이 단지 바울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은혜롭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더 믿음 안에서 강해지기를 바울 사도가 기도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를 시험 들게 만드는 일들이 이 세상에 많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 나중에는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흔들림이 없이 서 있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선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강해지지 않고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그날 아버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이 서게 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건 누구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믿음 안에서 우리 마음이 강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흔들리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그것 때문에 포기하지 말고 다시금 믿음을 굳게 다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다시 오실 주님만 바라보고 오늘 믿음 안에 굳게 서서 흔들림이 없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훈계로서 인도하며 도와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사망 권세 이기도록 지켜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이 귀한 찬송가 가사처럼 예수님 앞에 다시 만말 때까지 주님이 도와주시고 지켜주시는 귀한 성도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